15.09.10 서울여행(서울역~덕수궁~청계천) 출사
시작은 서울역 광장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느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도 형장에서 강우규 의사가 순국 직전에 남긴 유시
1884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사하여 한약방을 열었으며 또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1911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망명하여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뜻있는 동료들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의논하였다.
1915년부터는 요하현(饒河縣)으로 옮겨 산 뒤에도 블라디보스토크를 자주 내왕하면서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꾀하였다. 그리고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1917년에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이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노인단 길림성지부장(新韓村老人團吉林省支部長)이 되어 조직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 해 5월 노인단원 이발(李撥)·정치윤(鄭致允) 등 5명의 대표단이 서울에 들어와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이에 분개하여 노인단 대표로서 국내에 잠입해 일본총독 등 요인 암살을 결심하였다. 7월에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가서 최자남(崔子南)·허형(許炯) 등 동지와 거사계획을 세웠다. 8월에 서울에 잠입해 준비를 계속했다.
9월 2일 총독 사이토(齋藤實)가 부임차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해 마차에 오를 때, 품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신문기자·수행원·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사상자 중에는 총독부 정무총감과 만철이사(滿鐵理事), 미국 뉴욕시장의 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거사에서 총독 사이토는 화를 입지 않았다.
거사 뒤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와서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을 숨어다니다가,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혔다. 1920년 3월 경성지방법원 1회 공판 당시 최자남·허형·오태영 등이 공범으로 피수되었다.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기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詩)를 남겼다. 유해는 광복 뒤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현재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감옥공동묘지로부터 서울 우이동으로 이장하였다가, 다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우규 [姜宇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숭례문을 지나서 덕수궁으로 이동합니다.
사진을 잘 찍고 싶었는데.. 버스때문에 ㅡ.ㅡ
서울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로 원래의 명칭은 경운궁(慶運宮)이지만,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곳에 살면서 명칭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덕수궁 [德壽宮] (두산백과)
단청의 화사한 색깔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처마의 무늬도 좋고.. 사실 단청은 병충해를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처마 끝선이 넘 잘나온것 같습니다.
오늘의 베스트샷? 색감을 느낄 수 있는 사진..
고종의 연회 장소..
앙부일구 (해시계)입니다. 한자를 모르므로..
지금이 몇시 일까요?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조선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대표적인 해시계이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보급된 이 해시계는
오목한 솥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앙부일구(仰釜日晷)라는 이름도 그러한 형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앙부일구 (한국 미의 재발견 - 과학문화, 2004. 12. 31., 솔출판사)
유치원 견학을 왔나봅니다.
행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카메라를 피하시네요 ㅡ.ㅡ
종로로 이동합니다. 세종대왕 동상 옆에 써져있는 훈민정음
그리고 이순신 장군 상 옆에 그려져 있는 그림
확실히 줌렌즈는 단렌즈 만큼의 쨍한 화질을 보여주지 못하네요.. ㅎㅎ
이번엔 청계천입니다.
시원해지는 물줄기
보신각을 한번 둘러보고 촬영을 마쳤습니다.
보신각, 한양의 중심
옛 한양 운종가 동편의 종을 보호했던 누각이다.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만들어진 건물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후 현대에 새롭게 개축되어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1468년 만들어진 보신각 종은 제작시기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범종으로 보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파루(오전 4시)에 28번, 인정(오후 10시)에 33번 울리며 도성 4대문의 여닫는 시각을 알리던 종은 그 수명이 다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지금의 종은 1986년 제작된 ‘서울대종’으로 매년 새해 첫날이면 20t의 육중한 몸을 울려 한 해의 시작을 알린다. 1392년 조선 태조 이성계가 뜻을 세운 한양은 음양오행에 바탕을 둔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유교사상을 국가경영의 기본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행’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고 그중 ‘믿음(信)’을 중심으로 여겼다. 도성의 4대문에 한 글자씩 포함된 네 가지 덕목들과 함께 한양 중심, 보신(普信)의 전각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국가통치의 이념을 되새긴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신각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